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켓 가든 작전 (문단 편집) === 느린 속도 === >'Like threading seven needles with one piece of cotton, and we only have to miss one to be in trouble.' >이건 실 한가닥으로 바늘귀 7개를 단번에 꿰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개만 실패해도 모든 것이 실패한다. >---- >당시 영국군 근위 기갑사단의 작전 장교(operation officer)인 프레디 해네시(Freddie Hennessy)가 한 발언으로 알려져 있다. 마켓 가든 작전의 위험성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한 문장이라 여러 곳에서 인용하는 편이다.[* 출처: Lloyd Clark, Arnhem: Jumping the Rhine 1944 & 1945] 작전 이후 여러 보고서가 만들어졌으며 그중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방해한 독일군 제1공수군(급은 야전군이지만 실제 전력은 훨씬 낮았다)의 지휘관 [[쿠르트 슈투덴트]]는 공수작전인 마켓 작전의 내용 자체는 뛰어났다고 평가했지만 영국 30군단의 느린 진군 속도가 자멸을 자초했다고 비판했다. 그에 반해 당시 82공수사단장 제임스 개빈 준장은 30군단장 호록스 중장을 이제껏 봐왔던 지휘관들 중에 제일 현명했다고 평했다. 사실 아른험까지의 100km는 우회로도 없고 주변에 엄폐물도 없는 '''단 하나의 도로, 그것도 운하를 따라 형성된 국도'''로만 가야 했으므로 독일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느린 속도는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연합군 수뇌부가 독일군이 이미 졌고 싸울 마음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실제 방공포병들이 연합군 폭격기가 나타나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 경우도 있으므로 연합군의 분석이 틀렸다고 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른험에서 쉬고 있었던 부대는 정예 무장친위대(Waffen-SS) 소속 9SS '호엔슈타우펜', 10SS '프룬츠베르크'로 편성된 '제 2SS 기갑군단'이었다. 지휘관인 [[빌헬름 비트리히]] 장군은 동부전선에서 그 실력이 입증된, 무장 친위대에서 가장 유능한 기갑 지휘관일 뿐 아니라, 독일군 전투 지역 경계에 영국군 야전병원 설치를 용인하여 연합군과 독일군의 피해를 모두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성도 갖춘 인물이었다. 후일 비트리히는 마켓 가든 작전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유로 [[히틀러]]의 노여움을 사서 [[게슈타포]]에 연행될 위기에 처하나, [[발터 모델]] 육군 원수가 자신의 모든 권한을 동원하여 막아낸다. 독일 공군은 연합군의 패인으로 공수강하를 3일에 걸쳐서 계획한 점을 꼽았다. 실제로 작전 2일째부터는 안개가 끼는 바람에 타임라인에 엄청난 차질이 빚어졌다. 2일째 도착하기로 했던 폴란드 1공수여단이 수일이 지나서야 도착했던 것이다. 상황은 다른 공수부대들도 마찬가지였으나 예비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영국 1공수사단이 더욱 급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건 무려 3개 사단을 수송기 만으로 실어날라야 하는 작전이라 이런 대규모 공수작전을 처음 시도하는 연합군에겐 이만한 병력을 한번에 실어나를 수송기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